"크리스마스"란 단어는 원래 Christes Masse - 그리스도 미사(예배)라고 불리던 것이 중세 영국시대 때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성경 속에서 마태복음(1장, 2장)과 누가복음(1장, 2장)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정확한 시기는 이스라엘을 헤롯왕이 통치하던 중 호구 조사가 실시된 때 즈음이라는 대략적인 기록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후세의 학자들이 예수 탄생일을 성경과 천문학 자료 등을 바탕으로 거꾸로 추적했는데, 이 과정에서 예수 탄생일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 12월 25일을 성탄절로 보지 않는 학자들은 유대 지방이 그 때쯤 장마철을 보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온 것처럼 베들레헴 목자들이 들에서 양과 함께 머무르기가 기후상으로 부적합하다는 이유와 더불어, 성경에 나타난 제사장 봉사순서(눅 1:8)를 근거로 하여 ‘10월 성탄절’을 주장하며, 첫째 아담이 천지 창조 6일째 창조되었음에 근거한 것으로 둘째 아담인 예수 역시 새해의 6일째 되는 날 태어나셨을 것이라고 보는 1월 6일설 등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12월 25일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성탄절로 지켜져 왔는데 이러한 사실은 독일의 한 역사 학자 모므젠(Mommsen), 1817-1903)이 발견한 4세기 중엽 로마 역사가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 자료에는「가이사와 바우러스의 임기 중 서기 1년 12월 25일 금요일, 신월(新月)로 15일째 되는 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성탄절을 잘 지키지 못하다가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자 이를 기념일로 지키게 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그리스도의 탄생의 정확한 일시를 알 수 없게 되어 로마에서 이미 지켜지던 민속적 축일을 성탄절로 대체하였다고 알려진다. 본격적으로 교회가 성탄절을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A.D.354년 로마 교회의 리베리우스(Liverius)교황 때부터이며,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A.D.379년에 그때까지 1월 6일을 성탄절로 섬기던 동방교회(동로마제국)와 서로마 교회가 축제일을 통일한 이후부터 거의 모든 교회가 전통적으로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다.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을 정확하게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이미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12월 25일 성탄절을 구태여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실 A.D.354년에 로마 교회의 리베리우스 교황이 12월 25일을 공식적인 ‘아기 예수의 탄생일’로 교회력에 공식 절기로 제정하기 훨씬 전부터 교회들은 성탄절을 기념해 왔다. 성탄절이 교회의 절기로 지켜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필로칼루스력에 나타나는데 336년 복사본을 보면 이 당시 로마에는 이미 성탄절과 관련된 풍습이 존재했음이 나타나 있다.
또한 동로마 교회는 성탄절 공식 제정 이전부터 1월 6일을 현현절(Eppophany)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육적 생일뿐 아니라 영적 생일로 생각하며 강탄일로 지켜왔는데, 379년에 있었던 동,서로마 교회의 축제일 통일 작업과 431년 에베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를 거치며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1월 6일을 현현일로 분리하여 지키게 되었다.
사실 12월 25일은 절기상 동지(冬至)와 가까운 날이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농신제(Satunalia, 농사의 신을 경배하는 축제)가 열렸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낮의 길어짐을 기념하는 민속 절기 행사를 행하던 때였다. 따라서 초기 교회가 세속 문화의 교회 유입을 막아 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기독교 문화에 현실적으로 뿌리 깊은 세속 문화의 영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들 문화 가운데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은 살려 문화 자체를 점차적으로 기독교화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기독교문화로서의 성탄절을 지키게 된 것이다. 지금도 성탄절이 프랑스에서는 노엘, 독일에서는 봐이나흐프라는 용어로 불리우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내려온 각 나라의 민속 절기의 명칭이 그대로 성탄절을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85년 이후부터 해외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을 통해 성탄절이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성탄절은 당시 여러 나라에서 파견된 선교사의 영향으로 미국과 유럽의 풍습이 혼합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는 각 교회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풍성한 행사를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다.
뚱뚱하고 배가 불룩할 뿐 아니라 기분 좋게 "호! 호! 호!"하고 웃는 산타클로스는 4세기 소아시아 지방의 조교로 있었던 성 니콜라스(St. Nicholas)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해 만들어졌다.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 선물을 나누어 준다는 이야기는 실제 성 니콜라스가 불쌍한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누어 준 것을 기념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게다가 성 니콜라스는 성격이 워낙 소심하여,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성 니콜라스가 가난한 가족을 돕고자 몰래 굴뚝을 통해 던져 놓은 돈주머니가 우연히 말리고자 널어두었던 양말 속에 들어가면서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 가운데 기대치 않은 선물을 받았을 경우에 항상 성 니콜라스에게 감사하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오늘날까지도 아이들은 산타클로스가 굴뚝을 통해 내려와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고 간다고 믿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타클로스가 실존인물이든, 아니면 상상 속의 인물이든 아마 북부 추운 나라 어딘가에서 탄생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성 니콜라스는 터키의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남쪽 Myra(현재는 Kale)라는 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앞서 이야기한 성 니콜라스의 유명한 이야기는 소아시아에서 노르만족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후에 미국으로 많이 이민해 가면서 미국에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성 니콜라스의 이름은 라틴어로 ‘상투스 니콜라우스’였는데, 네덜란드인들이 이를 ‘산 니콜라우스’로 불렀고 AD 17세기경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은 ‘산테 클라스’로 불렀다. 이 발음이 그대로 영어화되고, AD 19세기 크리스마스가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오늘날의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산타클로스 이야기에 많은 흥미를 느꼈고, 이들이 자본화, 상품화하여 만들어 낸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지금의 ‘산타’로 재창조해 전세계로 역수출했다고 한다. 오늘날처럼 산타클로스가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는 모습으로 일반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은 182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뉴욕의 신학자 클레멘트 무어가 쓴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시가 효시였으며, 선물을 배달하며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즐겁게 외치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은 미국작가 Washington Irving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묘사한 모습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원래 날렵하고 키가 큰 것으로 알려졌던 산타가 지금의 통통한 볼과 뚱뚱한 모습을 하게 된 것은 미국 만화가 Thomas Nast가 20년동안 잡지에 성탄절 삽화를 그리면서 차츰 완성한 것이고, 동화책이나 광고에 등장하는 흰 털이 달린 빨간 옷과 검은 벨트, 긴 고깔모자 차림의 산타클로스는 1930년대에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 선전에 등장하고 난 뒤부터 알려졌다.
한편, 현재 핀란드에서 운영되고 있어 매년마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편지를 보내는 ‘산타클로스 마을’은 원래 북유럽에 구전되던 Odin과 Thor의 전설이 미국의 산타클로스와 결합하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본래 Odin과 Thor는 말과 염소를 타고 선물을 나눠주는 바이킹 전설 속의 신이다.) 다시 말해, 터키에 살았던 성 니콜라스의 이야기가 바이킹의 신화와 맞물려 핀란드에 정착한 것이 ‘산타클로스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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